이 논문은 한국전쟁기라는 시대적 상황 아래서 대한민국 교원의 삶을 고찰한 글이다. 연구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상황에서 교원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피난 상황에서 교원의 삶이다. 인민군 점령기, 점령 지역에서 교원의 삶은 이념에 따라 차이가 컸다. 교육계의 주도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로 하여 이미 표면적으로 척결된 좌익교원들에게 있었고, 좌익 교원의 재등장과 함께 우익 및 중립적인 교원들은 생존을 위하여 교육 활동과 무관한 ‘과거의 죄과’를 ‘청산’하는 여러 활동을 해야만 했고, 심지어 의용군 입대까지 해야만 했다. 그러나 9․28 서울 수복이 되자 좌익 교원들은 월북길을 택했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다시 ‘잔류파’라는 낙인과 함께 ‘비국민’의 혐의를 받아 사상 검증을 받아야만 하는 이중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인민군 비점령 지역의 일부 교원 역시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 사건 등 이념적 사건에 얽혀 국가에 의해 다수 희생당했다. 교원 본연의 교육 활동은 1951년 피난학교의 개설과 함께 본격적으로 재개되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한국전쟁기는 교원이 국가 체제 수호와 이념 전달의 ‘요원’으로 전락한 시대였다. 이때 박탈된 교원의 사상 자유는 교권의 핵심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유보’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한국전쟁은 교원들에게는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할 수 있다.
这篇论文试图从教师的生活角度去考察韩国战争时期的教育状况。所要研究的问题可以分成两个部分,一是韩国战争伊始,在朝鲜人民军占领下的教师的生活状况,另一个是避难的情形和在避难地的教师生活状况。在朝鲜人民军占领区,大韩民国政府成立前后表面上已被清除的左翼教师重新走到前面主导了占领区的教育。在这种情况下,右翼和中立的教师为了生存不得已从事与教育毫无关连的一些“清算”“过去罪恶”的各项活动,一部分加入了义用军。但是,9․28重新收复首尔以后他们的身上留下了“残留派”的烙印,还背上“非国民”的嫌疑而被接受思想鉴定,所以他们饱受了双重折磨。非人民军占领区的部分教师在韩国战争之后也被连累报道联盟等事件,很多教师受到了国家的迫害而被牺牲。1951年开办避难学校,教师们才真正得到了从事教育活动的机会,但是,这一过程当中经历了相当的经济困难。可以说韩国战争时期是一个教师们被沦落成守护国家体制和传达思想的“要员”的时代。这个时期,教师们被剥夺了思想的自由,尽管思想的自由是教师权利的一个核心因素,但是限制思想自由的状况一直“保留”到21世纪的今天,所以,可以说韩国战争对教师们来说是悲剧的起始点。
这篇论文试图从教师的生活角度去考察韩国战争时期的教育状况。所要研究的问题可以分成两个部分,一是韩国战争伊始,在朝鲜人民军占领下的教师的生活状况,另一个是避难的情形和在避难地的教师生活状况。在朝鲜人民军占领区,大韩民国政府成立前后表面上已被清除的左翼教师重新走到前面主导了占领区的教育。在这种情况下,右翼和中立的教师为了生存不得已从事与教育毫无关连的一些“清算”“过去罪恶”的各项活动,一部分加入了义用军。但是,9․28重新收复首尔以后他们的身上留下了“残留派”的烙印,还背上“非国民”的嫌疑而被接受思想鉴定,所以他们饱受了双重折磨。非人民军占领区的部分教师在韩国战争之后也被连累报道联盟等事件,很多教师受到了国家的迫害而被牺牲。1951年开办避难学校,教师们才真正得到了从事教育活动的机会,但是,这一过程当中经历了相当的经济困难。可以说韩国战争时期是一个教师们被沦落成守护国家体制和传达思想的“要员”的时代。这个时期,教师们被剥夺了思想的自由,尽管思想的自由是教师权利的一个核心因素,但是限制思想自由的状况一直“保留”到21世纪的今天,所以,可以说韩国战争对教师们来说是悲剧的起始点。